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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
정주원


사랑에 대한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문득이었어요. 서울문화재단 기획서를 쓸 때 즈음이니 작년 말이었겠네요. 자신의 기획서나 작가노트 혹은 cv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포함시킨다는 것은 작가에게 약간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보편적 가치를 뜻하는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잖아요. 그렇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허울좋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려 사랑이 아닌 것들에 덮어씌우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가 그 사랑의 이름을 빌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책임감을 많이 느끼는 일이 될 수 밖에요. 하지만 그런 이유로 포기하기에는 저는 항상 사랑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대단한 성과들은 사랑에서 혹은 사랑의 이름을 빌린 무언가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왔어요. 일종의 동력이자 에너지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해할 수 없고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없으면서도 이해하고 싶은 대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작업만 하던 예전과는 달리 간병같이 사랑하는 타인을 돌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야 했던 개인적인 상황들이 ‘사랑(특히 자발적 희생을 감수하게 하는 측면에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되뇌어보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모양을 바꿔가며 계속 굴러가는 말랑말랑한 돌멩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돌탑의 재료로 사용한 천사 점토처럼 말입니다. 거친 표면에서는 살을 빼앗겨 작아지기도 하고 아주 자그마한 덩어리가 주변을 흡수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하죠. 언제 굴러가기 시작했는지도, 언제 멈출지도 모른 채, 끝이라고 느낀 가장자리가 다시 시작점이 되며 굴러갑니다.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는 사랑의 풍경, 혹은 사랑 이후의 풍경에 대한 전시입니다. 제목이 다소 강렬해서인지 제목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텍스트가 아닌 목소리로 전달할 때면, 누군가는 ‘목적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로 잘못 듣곤 하고, 다른 누군가는 상대의 목젖을 향해 사랑을 던지라는 의미 또는 내 목젖에서 나온 외침을 다른 사람의 목젖까지 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더군요. 또한 하고많은 신체 부위 중 왜 하필 목젖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이 문장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말 “목젖까지 공산주의에 몸을 던지세요. 만약 여러분이 스무 살에 혁명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쉰이 넘어서는 가장 극한의 미친 늙다리 화석탱이가 될 것입니다.”에서 따온 것입니다.

 

몸을 끝까지 내던진다는 표현을 할 때 관용적으로 ‘손끝까지, 발끝까지 던지세요.’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의 신체 말단 부위는 언제나 자를 수 있고 다시 자라납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일은 어렵지 않고 받는 일도 그다지 감동적인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대뇌나 내장기관이라면 좀 감동적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주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신체에 해를 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받는 일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작업이 좀 더 열정적이었더라면<췌장까지 혹은 전두엽까지 던지세요, 사랑에>가 될 수도 있었을까요.

 

반면 목젖은 남을 해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몸 중에서 가장 안쪽의 신체 부위입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입을 크게 벌리면 내 두 눈으로 다른 사람의 목젖을 볼 수 있으니까요. 눈으로 볼 수 있는 몸과 눈으로 볼 수 없는 몸의 경계, 즉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몸의 내부에 있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미끌하고 축축한 분홍빛의 표면을 지녔지만 목젖은 목소리를 내는 것, 즉 자신을 주장하는 것과도 연관되기에 마냥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내장기관의 느낌과는 달랐습니다. 저에게 목젖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이자 본능과 이성의 중간 지점쯤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라는 제목만을 듣고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사랑을 하는 연인의 모습이나 에로틱한 장면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그림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막연한 단어를 두 사람 사이의 연애 감정보다는 어떤 에너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작업 중 일부는 사랑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나 실재하는 풍경에서 출발했고, 다른 일부는 완전한 관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표정을 가진 동그라미의 형상을 누군가는 샌드위치의 햄 같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난자 같다고도 하더라고요. 그게 뭔들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것들은 갉아먹히면서도 웃고 있고, 불타오르며 추락하고, 바다로, 땅으로 내던져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제 스스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이미지를 검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은 어찌 보면 모두 나 자신을 주장하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미술을 하는 청년작가로서의 나’, 와 같이 나의 입장에서 하는 나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가시거리가 좁아진 상태이죠. 이번 작업 역시 개인적인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이전과 달리 내 눈과 그림의 대상 사이에 거리 두기가 된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은 항상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반복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단번에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내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게 맞는 걸까라는 의문을 던지면서도, 그동안의 작업과정과는 다르게 그림을 그리고, 덧칠하고, 사포로 갈아내고, 물로 닦아내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올리고, 정 아니다 싶으면 젯소를 덮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을 대하는 저의 최선이었습니다.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는 목젖마저 던지지 못했던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답이 없는 것, 형체가 없는 것, 시간을 쏟은 만큼 받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목젖마저 내놓는 사랑을 하면 언젠가 ‘넥스트 레벨’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아무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번 전시에 제 목젖은 던져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인가 싶다가도 사랑하지 않으면 왜 이렇게까지 하지 싶은 것이 사랑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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